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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
  Girolamo Frescobaldi(1583-1643.03.01)

 

 


1583년 이탈리아의 페라라(Ferarz)에서 태어난 프레스코발디는 오르가니스트였던 그의 아버지 필리포 프레스코발디(Fillippo Frescobaldi)의 재력과 음악에 대한 관심 덕분에 어려서부터 유명한 스승들 밑에서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이 스승들 중의 한 사람이 알폰소 공작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이자 당대 최고의 마드리갈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던 루자스코 루자스키(Luzzasco Luzzaschi)인데, 나중에 프레스코발디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루자스키는 아치쳄발로(archicembalo)의 뛰어난 연주자이자 이론가였는데, 그 덕분에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악기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악기의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며 불과 14살 때 지역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고, 이탈리아의 여러도시에서 연주를 가졌고, 그의 실력을 인정한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현대에 복원된 아치쳄발로의 연주 영상


 

20대 초반 그의 고향인 페라리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된 그는 1607년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성당
(Santa Maria in Trastevere)의 오르가니스트로 1-5월까지 재직했다는 기록으로 당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로도스의 대주교 귀도 벤티볼료 (Guido Bentivoglio, Archbishop of Rhodes)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했고 교황의 외교사절이었던 귀도 대주교를 따라 유럽 각지를 여행하게 된다. 이 시기에 브뤼셀 궁에서
영국 출신 유명 작곡가인 피터 필립스(Peter Philips)를 만나기도 했으며 안트베르펀을 방문해 플랑드르 음악을
공부했다.

 

1608년 7월 프레스코발디가 아직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을 때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에서 그를 전속 오르가니스트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레스코발디는 여름동안 네덜란드에 계속 머물렀고 귀국하는 도중 밀라노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건반음악 모음집까지 출판해 10월말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오르가니스트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다른 음악활동도 활발히 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앞서 귀도 벤티볼료 대주교가 속한 벤티볼료 가문의 전속 악단에 참여하지만 신원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 연애사건으로 인해 탈퇴하게 된다. 1610년부터는 피에트로 알도브란디니 추기경(Cardinal Pietro Aldobrandini) 소속의 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613년에는 오솔라 트라발리니(Orsola Travaglini)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미 결혼전에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각가 한 명씩 있었다. 결혼후 3명의 자녀를 더 낳아 총 5명(3남 2녀)의 자식을 두게 된다.

 

1614년 10월에 그는 만토바 공작인 페르디난도 곤차가 측으로부터 상당히 좋은 조건의 일자리 제안을 받아 만토바를 방문하게 되는데, 대접이 너무나 냉정한 것에 실망하여 1615년 4월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1615년 건반악기를 위한 리체르카레 및 칸초나곡집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도 자주 연주되는 그의 기악음악들이 본격적으로 작곡 및 출판되었다. 그는 이 무렵 아주 많은 일을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추기경 알도브란디니를 섬겼고, 개인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다른 성당의 일도 했다. 1615년부터 1628년까지는 프레스코발디의 창작열이 가장 왕성했을 기간으로 그의 가장 중요한 기악곡들이 모두 이때 탄생했다. 
  
1628년 11월 22일, 성 베드로 성당 측은 프레스코발디에게 로마를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내주었고 그는 피렌체로 가서 토스카나 공작인 메디치를 위해 일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가장 높은 급료를 받는 음악가로 피렌체 세례당의 오르가니스트로 1년간 일했다. 1634년까지 약6년간 이곳에 머무는 동안 2권의 아리아집을 냈다.

 

1634년 다시 로마로 돌아온 프레스코발디는 교황 우르바노 8세(Pope Urban VIII)가 속한 바베리니(Barberini) 가문의 전속 음악가로 활동하게 되며, 동시에 성 베드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복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매우 중요한 건반음악작품 모음집인 피오리 무지칼리(Fiori musicali, 음악의 꽃)를 출판하게 된다. 1635년에 초판을 발행한 후 1637년에 증보판을 발행했는데, 이 작품집에 있는 작품들은 바로크시대를 넘어 19세기까지도 연구되었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피오리 무지칼리를 출판할 당시 그의 몸값은 당대의 어떤 음악가보다도 높았고, 이렇게 높은 인기와 명성을 누렸던 그였지만 60살이 되던 1643년 원인이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병에 걸려서 10일간 크게 앓아 누었으며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12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8세기 후반에 성당의 재건축 과정에서 무덤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12사도 성당에 그의 무덤대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음악

 

프레스코발디는 당대부터 건반음악의 대가로 널리 알려졌고, 그의 음악이 로마에 유행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의 음악은 스승이었던 루자스코 루자스키를 비롯하여 아스카니오 마요네(Ascanio Mayone), 지오바니 마리아 트라바치(Giovanni Maria Trabaci), 클라우디오 메룰로(Claudio Merulo)와 같은 베네치아 악파의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의 기본적인 음악 틀은 베네치아 악파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건반악기의 특성에 어울리는 독자적인 연주법인 화려한 장식음과 빠른 속주, 반음계적인 패시지등을 많이 창안하거나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그동안 사용되었던 정량기보법(mensural notation)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곡의 템포를 지정하고 곡 내에서도 자주 템포를 변화시켰다.

 

또한 프레스코발디는 건반음악의 양식면에서도 많은 공헌을 했다, 토카타, 카프리치오, 리체르카레, 칸조나, 환상곡등의 음악양식을 건반악기용으로 정착시켰다. 토카타와 카프리치오는 주제가 불규칙하게 반복되고 템포가 자주 바뀌면서 연주자의 연주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화려한 연주기법을 장착한 음악양식이 되었고, 리체르카레는 주제 제시 후에 성부 간의 모방을 특징으로 하며 후에 푸가로 발전하였고, 칸초나는 성악곡 양식이었는데 기악 양식으로 되면서 리듬을 강조하고 곡 전체가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환상곡은 즉흥곡에서 유래한 음악 양식으로 형식이나 대위법 등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작곡자의 악상을 자유롭게 풀어나가는 양식이다. 그리고 프레스코발디는 춤곡을 차용한 변주곡 양식을 최초로 시도한 작곡가이다. 원래 춤곡이었던 샤콘느나 파사칼리아의 변주기법에 주목해 이를 좀 더 확장시키고 체계화시켜서 건반악기용 음악장르로 정착시켰다. 그의 변주곡인  'Aria detta la Frescobalda(프레스코발디의 아리아로부터)'는 자작 주제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변주곡으로 알려져 있다.

 

기악음악 작곡가로 주로 기악곡을 작곡했지만 성악곡도 작곡했다. 1630년에 출판한 《성악을 위한 아리아(Arie Musicali per Cantarsi)》에는 아리아, 레치타티브, 소네트, 변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성악곡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성악곡들은 독창적인 기악음악에 비해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1608 건반음악모음집
 1615 건반악기를 위한 리체르카레 및 칸초나곡집
 1616 토카타 1집
 1624 건반음악곡집 <여러 주제에 의한 카프리치오>
 1627 토카타 2집
 1628 콘티뉴오와 악기를 위한 칸조나곡집
 1630 아리아집 1. 2권
 1635 피오리 무지칼리(Fiori Musicali 음악의 꽃) - 오르간 미사곡집으로 3개의 미사곡이 있다.
        미사 도메니카(Missa della Domenica, 일명 주일 미사),
        미사 아포스톨리(Missa degli Apostoli, 사도들의 미사),
        미사 마돈나(Missa della Madonna, 성처녀의 미사)
        기존의 성악 미사들과는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사 시작 전에 연주하는 <토카타>, 다음으로 <키리에> - <칸초나(층계송)> -  <리체르카레(봉헌송)> -       <토카타(성체거양)> 그리고 영성체 후에 연주하는 <칸초나>로 이루어져 있다. 미사곡 뒤에는 미사와

      전혀 연관이 없는 두 개의 카프리치오가 포함되어 있는데, Capriccio Bergamasca와 Capriccio sopra     

      la Girolmeta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세속 선율을 바탕으로 작곡되어 졌다.
 1637 100개의 선율을 묶은 파사칼리아(Cento Partite Sopra Passacag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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